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된 한국 영화의 기적

한국 이야기

03/07/2025 09:03

무명에 가까웠던 한국 영화가 역동적으로 성장하며 세계 영화계의 강자로 떠올랐다.

điện ảnh Hàn Quốc - Ảnh 1.

![한국영화]
한국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4편의 영화:
Timeless Bottomless Bad Movie (장선우, 1997),
Peppermint Candy (이창동, 1999),
오! 수정 (홍상수, 2002),
올드보이 (박찬욱, 2003)

베트남 영화진흥협회 부회장이자 BHD 부회장인 응오 티 빅 한씨는 1990년대 국제 영화 행사에 참가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한국 영화 부스는 행사장 구석의 작은 공간에 불과했다.

BHD가 미국 영화를 구매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한국 드라마를 사게 됐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 영화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한국 영화는 꾸준히 발전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30년은 한국 영화가 비약적으로 도약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번 다낭 아시아 영화제(7월 5일까지)에서 열린 한국 영화 특별 세션에서 베트남의 유명 감독 판 당 디(Phan Dang Di)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 시기에 왜 한국 영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điện ảnh Hàn Quốc - Ảnh 2.


‘악마의 소굴’, ‘아무것도 없는 곳’

부산국제영화제(BIFF) 집행위원장인 박광수 감독은 자신이 1980년대 초반 영화계에 발을 들였을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원래 미술을 전공했기에 영화에 대해 많이 몰랐어요.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한국 영화계를 ‘악마의 소굴’처럼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습니다. 주위 사람 중 아무도 영화판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어요.”

같은 시기, BIFF 초대 집행위원장이었던 김동호 전 위원장도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약 40년 전, 그는 박광수 감독과 함께 영화를 사랑하는 청년으로 서울대학교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우리는 늘 의문을 가졌어요. 왜 한국엔 영화제가 없을까? 왜 좋은 영화가 없을까? 왜 독립 영화나 상업 영화를 지원하는 시스템이 없을까? 왜 영화 박물관도 없을까? 한국엔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어요.”

그만큼 당시 한국 영화는 낙후되고 비합리적이었으며, 질적인 면에서도 매우 열악해 영화계에서 일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젊고 열정적이며 야망 넘치는 신진 감독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뉴웨이브(Korean New Wave)**가 시작됐다.

대표적으로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1988) 등이 있다.

그들은 정부의 엄격한 검열에도 불구하고 혁신적이고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 영화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1996년, 영화 검열제도가 폐지되면서 한국 영화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후 김기덕, 홍상수, 봉준호, 이창동 등 재능 있는 감독들이 대거 등장해 한국 영화의 국제적 위상을 끌어올렸다.

1996년 출범한 부산국제영화제(BIFF)는 한국 영화가 세계 관객과 평단에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이 되었고, 이는 한국 영화의 세계적 인지도를 높이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điện ảnh Hàn Quốc - Ảnh 3.


순수한 영화 사랑이 만들어낸 변화

박광수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순수한 영화 사랑으로 뭉친 젊은이들의 조용하지만 강력한 '운동'이 한국 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다.

당시 대학마다 영화 동아리가 생기기 시작했으며, 1988년쯤에는 전국 거의 모든 대학에 영화 동아리가 있었다.

또한, 1986년 개정된 영화법으로 영화 제작 허가제가 폐지되어 누구나 영화 제작에 뛰어들 수 있게 됐다. 이는 영화 제작사의 수를 급격히 늘렸고, 영화계 인력도 새롭게 교체되는 계기가 됐다.

기존 감독 중 임권택, 이장호 등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새 인물들이 영화계를 이끌었다.

2000년대 초, 한국 영화가 국제 영화제 수상과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김동호 전 위원장은 그때마다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어떻게 한국 영화가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크게 성장했나요?”

이 질문 뒤에는 ‘정부의 막대한 지원’, ‘전 국민의 영화 관람’, ‘천재 감독들의 등장’ 등 단일한 원인을 기대하는 시선이 깔려 있다.

하지만 김 전 위원장은 한국 영화의 성공을 단일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 사회 전반의 관심, 재능 있는 영화인들의 동시대적 등장 등 다양한 요인이 1990~2000년대 초반에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điện ảnh Hàn Quốc - Ảnh 6.


‘긴 팔 정책’과 영화진흥위원회(KOFIC)

판 당 디 감독은 한국 정부의 전략적 정책도 한국 영화 성장의 중요한 배경이라고 설명한다.

핵심은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역할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인 KOFIC는 1974년 설립된 한국영화공사를 모태로 한다.

1999년, 영화계 종사자와 전문가 9인으로 구성된 KOFIC가 새롭게 출범했다. 이들은 영화계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민간과 협력해 주요 정책을 수립했다.

박희성 KOFIC 정책연구실장은 **“정부 주도의 기존 시스템을 민간 주도형으로 전환한 매우 큰 변화였다”**고 강조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긴 팔 정책’을 펼쳤다. 정부가 지원은 하되, 직접 간섭하지 않는 방식이다.

KOFIC는 두 가지 핵심 프로젝트를 통해 영화 산업의 자생력을 높였다.

첫째, 민간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전문 영화 투자 펀드를 조성했다. 초기 ‘마중물 자금(seed money)’을 제공해 민간 투자 참여를 유도, 대규모 펀드를 형성했다.

이 펀드는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등 굵직한 한국 영화 제작에 쓰였다.

둘째, 전국 영화관 매출을 실시간으로 집계하는 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투자자는 영화 수익성을 신속히 파악할 수 있어 대규모 투자 유치가 가능해졌다.

또한, KOFIC는 민간이 어려운 분야인 영화학교 설립, 해외 영화제 참가 지원 등에도 적극 나섰다.

Điện ảnh Hàn Quốc bước ra từ nơi chẳng có gì - Ảnh 9.


한국 영화의 오늘

이제 한국 영화는 더 이상 변방의 존재가 아니다. 아카데미 4관왕을 휩쓴 기생충,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브로커, 세계가 주목하는 수많은 K-콘텐츠는 모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된 한국 영화의 눈부신 성장의 결과다.

영화 강국 한국, 그 뿌리에는 순수한 청년들의 꿈, 정부의 정책, 민간의 협력, 그리고 멈추지 않는 도전 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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